루터선집 48권 서한집 1 (Letters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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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크 슈팔라틴(George Spalatin)에게 비텐베르크(Wittenberg), 1516년 10월 19일

1515/16년 루터는 로마서에 대해 강의하였다. 그의 작업은 불가타역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러나 에라스무스(Erasmus)가 그리스어 신약성경 본문을 출판하자마자 루터는 이 에라스무스 판을 사용하였고, 이는 루터를 에라스무스의 신학으로 인도해주었다. 루터는 에라스무스의 학문성을 인정하긴 했지만 자신과 에라스무스의 신학 사이를 갈라놓는 큰 간격이 있음을 깨달았다. 문제가 되었던 것은 칭의(ustification)와 성경 해석이었다. 이 서신에서 루터는 에라스무스를 비판하며 슈팔라틴에게 자신의 견해를 에라스무스에게 전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루터와 에라스무스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본서 뒤의 36번 서신을 참조하라. 또한 앞의 2번, 7번 서신과 뒤의 18번 서신을 참조하라. 게오르크 슈팔라틴에 대해서는 앞의 3번 서신을 참조하라.
라틴어 본문: WA, Br 1, 70-71.

[사도행전에 대해] 지극히 학식 있는 석사이며, 그리스도의 종이요 주의 사제이며, 제 신실한 친구이자 강직한 형제인, 게오르크 슈팔라틴께

예 수

인사드립니다. 슈팔라틴 씨, 지극히 학식 있는 에라스무스에 대해 제가 혼란스러운 것은 이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설명하며 그는 “행위” 나 “율법” 혹은 (사도가 그렇게 지칭했던 것처럼) “우리 자신의 의”1)에서 나오는 의가 [구약성경의] 제의적이고 은유적인 율법준수(ceremonial and figurative observances)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나아가 그는 로마서 5장에서 사도가 원죄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진술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가 그러한 것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말이지요. 에라스무스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가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을 논박하며 썼던 책들을 연구했더라면 (특히 「문자와 영에 대하여[On the Letter and the Spirit]』, 「죄인의 공로와 용서에 대하여 [On Merits and Forgiveness of Sinners]』,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의 두 서신을 논박하며[Against the Two Letters of the Pelagians]』 그리고 「율리우스에 반대하며[Against Julian]』2) 같이 거의 전부다 아우구스티누스 전집 8권에 들어 있는 이 논문들을 연구했더라면),3) 그리고 에라스무스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는 어떤 것도 자신의 지혜에서 온
것이 아니라 키푸리아누스(Cyprian),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우스] ([Gregory of] Nazianzus), 레티쿠스(Rheticus), 이레니우스(Irenaeus), 힐라리우스(Hilary), 올림피우스(Olympius), 이노센트(Innocent), 암브로시오스(Amborose)와 같은 가장 탁월한 교부들에게서 왔음을 인정했더라면, 4) 그는 사도를 올바로 이해할 뿐 아니라 지금까지 그가 해왔던 것보다 아우구스티누스를 더 높이 인정했었을 것입니다.
|저는 이점에서 명백히 에라스무스와는 의견이 다르다고 말하는 데 주저함이 없습니다. 에라스무스 자신은 모든 것에 있어 아우구스티누스보다 히에로니무스(Jerome)를 선호하지 않았지만, 저는 성경 주석에 있어 아우구스티누스에 비해 히에로니무스를 높이 평가하기에 그렇습니다.5) 제 종단에 헌신해야 한다고 해서 제가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인정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연히 아우구스티누스의 책을 발견하기 이전에는 저는 그에게 조금도 관심이 없었습니다.6) 그런데 저는 성 히에로니무스가 성경의 역사적 의미를 강조하고 거기에 큰 비중을 두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참 놀라운 것은 그가 성경을 대충 훑어볼 때가 예를 들어 그의 서신들에서 처럼7)-그가 중요하지 않은 자신의 저작들에서8) 성경을 고심하며 연구했을 때보다 오히려 그가 성경을 더 잘 해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에 기초한 의”나 “행위에” 기초한 의는 결코 단순히 [종교적] 의식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십계명 전체를 성취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없이 성취한 것은, 그것이 사람이 보기에는 전혀 비판할 수 없는 파브리키우스(Fabricius) 나 레굴루스(Regulus) 같은 사람들이나9) 혹은 그와 같은 다른 사람들을 만들어 낸다 해도, 사과가 무화과나무와 닭지 않은 것보다 더 의와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스스로 속이지 않고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믿었던 것처럼 의로운 행위들을 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10) 오히려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의로운 사람이 되고 의로운 사람일 때 우리는 의로운 행위들을 합니다. 먼저 사람이 변하는 것이 필요하고 그 후에 행위가 [따라옵니다]. 아벨은 그가 드리기 이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11) 이에 대해서는 다른 때에 더 말하도록 하지요.
그래서 저는 당신이 친구나 기독교인으로 섬기기를, 그리고 에라스무스에게 제 생각을 알려주기를 청합니다.12) 저는 그가 높이 존경받기를 소망하고 바랍니다. 그러나 그의 명성 때문에 많은 이들이 [성경에 대해] 문자적인 이해, 즉 죽은 이해를 옹호하게 될까 두렵습니다.13) 리라(Lyra)의 주석과14) 성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작성된 거의 모든 주석들이 그러한 이해로 가득 차 있습니다. 특별하게 영적이고 가장 건전한 사고를 가졌던 사람인 스타푸렌시스(Stapulensis)조차도15) 하나님의 성경을 해석하는 데 있어 영적 이해가 부족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아실 것입니다만, 그는 분명히 자신의 삶의 행위 가운데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는 가운데 그러한 이해의 상당부분을 보여주었습니다.
당신은 경솔하게 나보고 그와 같은 유명 인사들을 아리스타르쿠스(Aristarch)의 채찍 아래 데려오라 할 지 모르겠습니다.16) 제가 이렇게 하는 것이 신학과 형제들의 구원을 위한 관심에서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면 말이지요.
슈탈라틴 씨, 안녕히 계십시오,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1516년 10월 19일, 우리 수도원 구석에서 서둘러 작성하며

아우구스티누스회
수사 마르틴 루더(MARTIN LUDER)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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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마서 9:31-32; 10:3.
2)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을 논박하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들에 대한 참고문헌목록으로는 Patrology, pp. 508 f.; O.D.CC, pp. 107 f.를 참조하라. 그 본문을 위해서는 MPL 44, 45를 참조하라. 영어본문을 위해서는 PNF 5를 참조하라. 펠라기우스 수의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예정론에 반대하여 절대적 자유의지 개념을 주장했던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적들이었다.
3) 루터는 요한 아머바흐(John Amerbach)가 1506년 바젤에서 출판한 성 아우구스티누스 전집 판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4) 이들 교부들의 생애와 저작들에 관해서는 OD.CC와 Patrology를 참조하라. 그들의 저작 가운데 어떤 것을 루터가 실제로 연구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 시대(4세기 초) 아우툰(Autun)의 주교였던 레티쿠스와 역시 콘스탄티누스 시대 스페인의 주교였던 올림피우스의 저작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들에서의 인용을 통해서만 루터가 알고 있었다. 교회교부들에 대한 유사한 목록이 WA 1, 607; LW 31, 214 f.에 있다.
5) 성서학자로서의 성 히에로니무스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O.D.CC, pp. 719 f. 와 Patrology, pp. 46 ff. 를 참조하라.
6) 루터는 분명히 일반교육과정(studium generale)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 일부와 친숙하게 되었다(참조, 뒤의 10번 서신, n. 3). 하지만 그가 1509년 이전에는 그것들을 주의 깊게 연구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에는 일반적으로 이견이 없다. 뒤의 15번 서신을 참조하라.
7) 루터가 그것들을 꽤 주의 깊게 연구했음에 틀림없다. 앞의 6번 서신을 참조하라.
8) 즉, 성경에 대한 다양한 책들을 그가 주해한 것들. 이것들에 대한 평가를 위해서는 Patrology, p. 470을 참조하라.
9) 로마 역사의 두 영웅: 가유스 파브리키우스 루스키누스(Gajus Fabricius Luscinus: 참조, O.C.D, p. 355)와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Marcus Atilius Regulus; 참조, O.C.D., p. 757).
10)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마쿠스 윤리학(Nicomachean Ethics)」, Ⅱ1, 1-7을 인용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루터의 평가에 대해서는 뒤의 12번, 14번 서신을 참조하라.
11) 창세기 4:4.
12) 1516년 12월 11일에 슈팔라틴은 요청받은 대로 에라스무스에게 서신을 썼다. 그의 서신에는 루터 서신의 많은 부분이 다시 기록되어 있으나, 루터의 이름에 대한 언급은 없다. Allen 2, 501을 참조하라. 1517년 11월 13일 슈팔라틴이 다시 상기시켜주는 서신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에라스무스는 이 서신을 인정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아 보인다. Allen 3, 711을 참조하라. 슈팔라틴이 보낸 첫 번째 서신은 없어졌거나 혹은 에라스무스가 매우 화가 나서 답변하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다.
13) 루터는 성경의 “문자적”, “역사적”, 혹은 “죽은” 이해를 “영적” 이해와 상반되는 것으로 보았다. 영적 이해는 성경 독자가 본문을 “객관적으로” 볼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상황에 그것을 적용시키어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성경 이해에 있어서의 이러한 구별은 “죽이는 문자”와 “생명을 주는 영”(고후 3:3-6) 사이를 구분했던 바울의 배경을 아우구스티누스가 그의 저서 「영과 문자에 대해(De spiritu et litera)」에서 해석한 것과는 다르게 보아야 한다. 뒤의 18번 서신, n, 7을 참조하라.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구절을 하나님의 율법과 하나님의 영 사이를 구별하는데 적용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율법은 순종을 명하지만 순종을 불러일으킬 수는 없다. 따라서 사람을 정죄하거나 죽여야 한다. 그러기에 “죽은” 이해이다. 영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하나님의 계명들을 성취하도록 해주기에 생명을 준다. 보다 더 자세한 내용을 위해서는 Jaroslav Pelikan, 「해석자 루터(Luther the Expositor)』 (companion vol. to LW 1-30), pp. 5 f; Gordon Rupp, 「하나님의 의: 루터연구들(The Righteousness of God: Luther Studies)」 (New York, 1953), pp. 81 ff.; W. A. Quanbeck, “루터의 초기 주해들(Luther’s Early Exegesis),” 「오늘날의 루터(Luther Today)」 (“마르틴 루터 강의들[Martin Luther Lectures),” Vol. I [Decorah, lowa, 1957), pp. 37 f.; LCC 15, xxiv ff. 를 참조하라.
14) 프란시스코 수도회(O.F.M.)의 리라의 니콜라스(Nicholas of Lyra, 12702-1340?)는 성서주해서인 「신구약성서의 변함없이 계속 될 주석(Postillae perpetuae in Vetus et Novum Testamentum)」을 썼다. 이것은 중세 후기 성경 해석 핸드북이었다. “당시의 알레고리적 성경 해석과는 반대로 그는 정확한 문자적 의미에 도달하고자하였다.” (O.D.CC, p. 957). 「첫 번째 시편 강의」에서(참조, 본서의 7번 서신, n. 3) 루터는 리라의 주해를 많이 이용하였다. Fife, pp. 193 f.를 참조하라. 여기에서의 루터의 진술은 그가 리라의 작품을 뛰어난 역사가의 작품으로 분명하게 높이 추천하였던 (안토니 라우터바흐[A. Lauterbach]가 기록한) 후기의 그의 논평과 비교되어야 한다. WA, TR 4, No. 4673을 참조하라.
15) 스타푸렌시스는 유명한 프랑스 인문주의자 에타플의 르페브르(Lefevre d’Etaples,14552-1536)의 라틴어 이름이다. O.D.CC, p. 489를 참조하라. 그는 1509년 시편주석(Psalterium Quincuplex)을 그리고 1512년 바울서신 주석을 출판하였다. 루터는 그의 「첫 번째 시편 강의」에서 이전 작품을 많이 이용하였으며(참조, 본세서의 7번 서신, n. 3; Fife, pp. 190 ff.), 그가 책상에서 작성하며 여백에 많은 메모를남긴 사본은 지금도 가용하다. WA 4, 466 ff.를 참조하라. 루터 성서 해석학의 발전에 있어서 리라와 파버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각주 13에 있는 문헌을 참조하라. 또한 Schwiebert, pp. 275 ff.; Fife, pp. 179 ff; K. Bauer, 「비텐베르크대학의 신학과 독일 종교개혁의 시작(Die Wittenberger Universitatstheologie und die Anfánge der Deutschen Reformation)」 (Tübingen: J.C.B. Mohr, Paul Siebeck, 1928)을 참조하라.

16) 키케로(Cicero; Ep. ad Atticum I, 14, 3), 호라티우스(Horace; Ars poetica 450), 그리고 다른 고전 저자들은 사모트라케의 아리스타르쿠스(Aristarch of Samothrace, 2152-143? B.C.)를 당시까지의 비평가들 가운데 가장 신랄한 비평가로 생각하였다. OCD, p. 89를 참조하라. 루터는 에라스무스의 작품들을 통해 아리스타르쿠스에 대해 배웠을 것이다. Clericus 2, 205, A를 참조하라.
17) 앞의 6번 서신, n. 6을 참조하라.

담임목사
Author: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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